[윤경민 칼럼] '의인' 이수현은 살아있다
저녁 바람이 시렸던 2001년 1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 도쿄 신오쿠보역 선로에 떨어진 승객을 구하려 뛰어내렸다가 돌아오지 못한 이수현. 그의 의로운 죽음은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배타적이고 보신적 성향이 강한 일본인들은 생전 일면식도 없는 한국 유학생이 일본인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당시 일본은 청소년들의 방종과 나약함,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적 위기로 인식되던 시기였다.
NHK는 사고 한 달째를 맞아 특집 추모 프로그램을 방송하며, "일본 사회가 이수현 같은 젊은이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아사히신문은 "이수현의 죽음이 일본 사회에 환한 불빛을 밝혔다"고 평가했다.
이수현이 다녔던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에는 그의 용기에 감동과 찬사를 보내는 추모 편지가 쇄도했다.
"당신의 26년의 삶은 500년을 산 사람보다 더 깁니다"(이누카이)
"구세주 같은 분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이마노)
"같은 또래의 아들 딸을 두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스즈키, 사이타마현의 시오타)
모리 요시로 총리와 고노 요헤이 외무상을 비롯한 주요 각료들과 정치인들도 장례식에 조문하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모리 총리는 "이 씨의 용기 있는 행동이 일본 젊은이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가르치겠다"고 다짐했다. 추도식에는 천 명이 넘는 일본인이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고인의 살신성인 희생정신이 한일 양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추모했다. 전국에서 조의금과 성금, 위로 편지가 유족에게 답지했다.
이수현의 죽음은 일본사회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사고 이후 일본에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는 사례가 줄을 이었다. 2001년 2월 1일 나고야 쓰루마이역에서 자살하려던 고교생을 구조한 회사원은 "학생이 뛰어내리는 것을 본 순간 신오쿠보역에서 발생한 사고가 떠올라 용기가 났다"며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돼 정말 다행이다"고 말했다.
2006년에는 같은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여대생을 구한 일이 알려져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필자에게 여대생을 구했던 신현구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사람이 떨어져서 누워서 가만있는 거예요. 보니까 다리가 틈새에 들어갔더라고요. 아무도 나서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가방을 던지고 뛰어들어서 다리 들고 몸 들고..."
이수현의 묘소에는 여전히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24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부산 금정구 영락공원에 있는 이수현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며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빛나는 의인 이수현,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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