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복통이 나거나 설사를 하게 되면 먹던 약 정로환. 이 약은 요즘도 많은 이들이 가정상비약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로환이 국내에서 보급된 것은 1972년.
동성제약 회장이 일본 다이코 제약의 전 공장장에게 술대접을 거하게 하고 제조법을 전수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 말인 즉 정로환은 원래 일본에서 개발된 약이라는 것. 그런데 그 이름의 유래를 알면 과연 우리가 이 약을 정로환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찜찜해진다.
정로환은 원래 일본어로 征露丸이었다. 露는 러시아를 뜻하는 것이고 征은 정복한다는 말. 丸은 둥그렇게 만든 알약. 그러니까 정로환은 러시아를 정복하는 알약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배탈약 설사약 이름을 왜 정로환이라고 지었을까? 역사는 러일전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2년 오사카의 약품상이던 '나카지마 사이치 약방'은 진통제인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환약을 충용정로환(忠勇征露丸)이라고 이름 붙여 오사카부로부터 판매 허가를 받았다. 1902년은 영일동맹을 체결한 해로,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 육군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위장약으로 사용하던 크레오소트 환약을 ‘정로환’(征露丸)이라고 명명한 뒤 전 장병에게 복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성제약이 다이코 약품 전 공장장으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서 국내에서 정로환을 판매해왔는데 이 약이 크게 인기를 끌자, 다른 제약 회사들도 같은 이름의 약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타격을 입게 된 동성제약이 보령정로환을 내놓은 보령제약을 상대로 상표권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정로환은 보통명사라고 하면서 보령제약 손을 들어줬다. 이후로 많은 제약회사들이 너도 나도 정로환이라는 이름의 약을 생산해 팔기 시작했다.
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 육군이 한반도 침략 와중에 벌였던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를 정복하자는 뜻으로 만든 배탈약 ‘정로환’을 국내 제약회사들이 너도 나도 앞다퉈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런 뜻을 가진 정로환이 보통명사라고 판결했던 당시 재판부는 도대체 이 어원을 알고 판결을 내렸을까? 우리는 이 약 이름을 지금도 정로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이런 역사를 알고 배가 살살 아파오면서 씁쓸해지는 건 필자뿐일까.
유튜브에서 헬로tv뉴스를 구독해주세요!
[제보] 카카오톡 '헬로tv뉴스' 검색 후 채널 추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
- [윤경민 칼럼] 시한폭탄 후지산 ... 대규모 분화에 대비하는 일본
- [윤경민 칼럼] '3단계 북핵 해법' 실효성 있을까
- [윤경민 칼럼] 이재명 대통령의 대일 메시지에 일본도 화답해야
- 정신병적 파멸로 읽는 『채식주의자』
- [윤경민 칼럼] 이태백, 사오정, 오륙도... 死語가 되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 [윤경민 칼럼]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발견한 인생
- [윤경민 칼럼] 나는 관종이다 ... SNS가 만드는 행복과 불행
- [윤경민 칼럼] 일본보다 높은 고령자 취업률… 일자리의 양보다 질을 높여야
- [윤경민 칼럼] 무너지는 교권...누가 교사를 지키는가
- [윤경민 칼럼] 영화 '어쩔 수가 없다' ... 명대사로 해석하는 메시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