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애초에 모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악산은 생애 네 번째였습니다.
이번엔 다른 코스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공룡능선'. 험하기로 소문났고 그러기에 완주하면 성취감이 있다는 코스 말입니다.
새벽 3시에 속초 모텔방에서 일어나 세수만 하고 나왔습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군요. "바위산이라 미끄러우면 위험할 텐데 하필 비가 오네" 불평을 읊조리며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서울은 전날 저녁 폭우가 쏟아졌다니 부슬부슬 비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새벽부터 편의점을 찾은 건 산에서 먹을 건 전날 저녁 마트에서 가득 사놨기에 위장을 충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2시간 산을 타야 하기에 에너지 풀 충전이 필요했습니다. 편의점 주인이 별도로 만들어 파는 김밥 세 줄과 컵라면 두 개를 샀습니다. 김밥 두 줄은 점심 식사용으로 배낭에 찔러 넣고 컵라면과 김밥 반 줄씩으로 충전을 완료했습니다. 새벽 3시 반에 말이죠. 전날 저녁 7시 넘어 회 한 접시와 매운탕에 라면까지 넣어 배불리 먹었는데 새벽 3시에 또 배를 채운 겁니다.
캔커피로 입가심을 하면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출발지인 소공원에 도착한 건 새벽 4시였습니다. 우리 말고도 헤드랜턴을 착용한 산꾼들이 5~6명 보이더군요. 캄캄한 비 내리는 새벽에 다들 극기 훈련에 나선 사람들 같았습니다.
등산화 끈을 조여 매고 화장실에서 몸무게를 줄인 뒤 출발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설악산, 귀뚜라미가 울었지만 아직은 여름의 끝자락이었습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계곡이 옆에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이삼십 분이 지나자 신흥사가 나왔습니다.
그 새벽 시간에 커다란 불상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 드리는 여인이 있더군요. 수험생을 둔 엄마일까, 병치레를 하는 남편의 부인일까, 무슨 속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여인의 절하는 뒷모습에서 간절함이 느껴졌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선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비선대였습니다.
물론 동 트기 전이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왼쪽이 마등령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표지판만 헤드랜턴 빛으로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일출은 6시 넘어서라고 예보돼 있었지만 여명은 그보다 일찍 시작됐습니다.
헤드랜턴 빛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여명으로 날이 밝아오면서 한낱 전구가 내는 빛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던 겁니다. 캄캄한 한밤중에는 환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위대한 태양 앞에서는 가물치가 다스리는 저수지 속 송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이 트면서 설악산이 점차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깎아지른 듯한 기암괴석은 운해와 어우러지며 한 폭의 동양화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이 상투적 표현 밖에 떠오르지 않는 장관이었습니다.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내륙 쪽은 구름이 걷혀 푸르른 산자락과 봉우리 봉우리, 높은 가을 하늘이 펼쳐진 반면 동해 쪽은 온통 흰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처럼 말이죠. 구름은 넘실 넘실 안개가 되어 서쪽으로 넘어오며 사라졌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설악산 공룡능선이 우리네 인생과 닯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더군요. 험한 길이 있으면 다소 편안한 길도 있습니다. 오르막에 올랐다고 그곳이 정상은 아닙니다. 물론 설악산 정상은 대청봉이니 빨갛게 대청봉이라고 쓰인 비석에 서서 인증샷을 찍으면 정상을 정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곳에 언제나 머물 수는 없습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비바람, 뙤약볕을 견디며 정상에서 평생 우뚝 서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니겠습니까. 다음 인증샷 찍을 사람을 위해 비켜줘야 합니다. 설사 "여긴 내 자리야"라고 우기며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다고 해도 거기가 최고봉은 아닙니다. 1,708m의 대청봉은 다른 산에 견주면 그리 높은 꼭대기가 아닙니다. 한라산 정상은 1,950미터입니다. 물론 에베레스트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입니다. 8,848.86m입니다.
공룡능선을 지나면서 인생을 떠올리게 한 것은 또 있습니다.
반 발만 앞으로 내딛어도 바로 추락사할 것 같은 마흔 길 낭떠러지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헛디뎌 구조대를 불러야 할지 모를 난코스와도 여러 차례 마주했습니다. 밧줄을 잡고 마치 유격훈련을 하듯 올라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쇠 난간을 붙들고 뒷걸음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는 곳도 있습니다. 하중을 분산해주는 스틱 두 자루가 이럴 땐 외려 방해가 됩니다.
마등령 삼거리를 지나, 무너미고개까지가 공룡능선입니다.
4.9km 구간입니다. 그런데 이 구간에만 큰 봉우리가 9개는 되는 듯합니다. 이름을 발견한 봉우리는 4개입니다. 나한봉, 큰새봉, 1275봉, 신선봉. 하지만 이름 없는 봉우리도 그 이상 있습니다.
기를 쓰고 경사 높은 곳을 힘들게 올라 경치 구경하고 나면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입니다.
다 내려왔나 싶으면 이번엔 더 험준한 봉우리가 우리 앞에 떡하니 서 있습니다. 또 한 고개 오르고 내려 뒤를 돌아봅니다. "어떻게 저 높은 곳을 올라갔었지?"
열심히 뛰놀고 공부하고 때로는 옆길로 샐 때도 있었습니다.
예민한 감수성에 울며 울었던 학창시절 말입니다. 지나고 보면 지나온 봉우리 중에 하나였을지 모릅니다. 뜨겁게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러다 다투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결혼생활도 지나고 보면 마등령 삼거리에서 무너미 고개까지 가는 구간의 봉우리 가운데 한두 개 였을 겁니다. 죽도록 일하고 승진하고 잘 나가다가 절망도 맛보고 희망이든 구조조정이든 정년이든 사오정이든 그렇게 일터를 떠나는 것도 마지막 봉우리를 지나 내려가는 길이라고 해야 할까요.
새벽 4시에 출발한 산행은 오후 4시 좀 넘어 마무리되었습니다.
꼬박 12시간 넘게 걸린 겁니다. 애초 목표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12시간 걸리는 코스라고 하니 대략 그 정도 걸리겠거니 하고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도전과 모험보다는 안전이 우선이었습니다.
체력이 바닥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수시로 먹고 마시고 쉬었습니다.
소모한 체력보다 되레 흡입한 열량이 더 많았을 겁니다.
전날 마트에서 사 간 먹거리가 배낭의 절반을 차지했으니까요. 바나나 2개. 자두 3개, 단백질에너지바 2개, 빵 3개, 500ml 생수 3개.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싸간 오이, 방울토마토, 복숭아가 도시락 통으로 가득이었습니다.
새벽 편의점에서 사간 김밥 두 줄까지 이걸 12시간 산행 중에 쉬엄쉬엄 거의 다 먹어치웠습니다. 그리고 하산 후 이른 저녁으로 소고기 등심에 605k칼로리 열량의 롯데리아 팥빙수까지 먹었으니 아마도 평소의 3~4배 열량을 채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총 20.7km 구간이었습니다.
하산길은 비교적 수월했습니다. 9개가량의 깔딱 고개를 넘어왔으니 내리막으로만 이어진 길은 그야말로 '껌'이었죠.
희운각 대피소를 거쳐 양폭대피소, 그리고 천불동 계곡을 거쳐 비선대, 소공원까지.
선녀들이 놀았을 폭포는 아름다웠습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천당폭포, 오련폭포 ...
그리고 정말 누군가 깎아놓은 듯한 절벽과 그 바위 틈바구니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푸른 소나무들, 자연의 위대함과 환상적 풍경에 취해 12시간 설악산 공룡능선 등반을 완주했습니다.
막판에 무릎이 시큰거려 불편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50대 후반에 저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은 60대 형님과 함께 한 이번 설악산 공룡능선 완주는 제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를 내다보는 데 있어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준 여행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인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공룡능선 9개 봉우리 가운데 몇 번째 봉우리에 서있는 것일까? 방금 지나온 난코스가 내가 살아갈 인생에 또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이 뒤엉키며 그날 거기서 본 운해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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