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협상이 지난 7월 말 큰 틀의 합의를 이루고도 세부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양국의 줄다리기가 장기화하는 양상이다. 구두로 합의한 것은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3,500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고 1,0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기로 한 것이다.
가장 큰 쟁점은 3,500억 달러 투자 방식에서 미국이 일본의 선례를 따를 것을 요구하는 점이다. 즉 미국이 지정하는 프로젝트에 45일 내 투자를 집행하고 투자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3,500달러면 한국 외환보유고의 84%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따라서 45일 이내에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미국이 지정하는 프로젝트에 넣을 경우 외환보유고는 사실상 후진국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외환시장이 요동칠 리스크를 안게 될 수 있다. 때문에 한국 정부는 미국 측에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부정적이다. 안전장치 없는 미국의 요구 수용은 매우 위험하다.
오죽하면 이재명 대통령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미간) 통화 스와프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천500억 달러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우려했겠는가.
국운이 달린 이번 한미 관세협상에서 정부는 고도의 협상 전략을 발휘해야 한다. 국제협상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투레벨게임'도 적극 활용할 가치가 있다. 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이 1988년 제시한 것으로, 국가 간 협상은 당사국 간뿐 아니라 국내 문제가 상호 작용한다는 이론이다.
투레벨게임 이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협상 대표자는 타결 내용을 국내에서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국내 여론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으로는 국내 비준을 받을 수 없다"며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발목 잡히기'로 불리는 투레벨게임의 주요 전술을 활용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면 탄핵감"이라고 발언한 것이나, 김민석 총리가 "국회 동의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힌 점, 조현 외교부장관이 "그대로 받았다면 경제에 주름살"이라고 국회에서 언급한 것이 전형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여기에 덧붙여 통화 스와프 없이 3,500억 달러 현금 투자한다면 1997년 외환위기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전략적 발언으로 풀이된다.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쇠사슬 사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된 상황에서 불리한 조건의 관세협상은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대한 지지율과도 직결될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정부가 그동안 강조해 온 '국익 최우선'이라는 원칙 아래 최대한 유리한 협상 결과를 도출하려면 투레벨게임의 추가 전술 구사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발목 잡히기'를 더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회 비준을 전제로 협상하고 있음을 미국 측에 인지시키고, 미국 측의 일방적 이익으로 이어지는 투자는 한국 국민이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국회 비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 대통령 탄핵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이른바 '고삐늦추기'를 구사해야 한다. 국내에서의 합의 지지를 얻기 위해 피해 산업에 대한 보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협상 결과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될 산업 분야의 기업들에 대한 합리적 보상을 설계하고 제시해야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협상 결과에 대한 국내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셋째, 미국 내 우호세력을 동원하는 전술이 필요하다.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세력, 반도체와 배터리 등 공급망 안정지향 세력, 한국 투자로 인해 고용 창출 등 이익을 보는 세력, 소비자단체와 주요 싱크탱크 등 우호세력을 규합해 미국 내 여론에 영향을 미치도록 물밑에서 움직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 3국과의 공조가 필요하다. 일본은 이미 서명해 제외되었다면, 아직 진행 중인 국가들과의 ‘물밑 공조’는 유효한 억지력이다. 다만 중국과의 노골적 공조는 미국 내 정치에 반작용을 낳을 수 있으므로 이슈별·사안별 느슨한 연대가 바람직하다.
한미 관세협상은 국내 정치와 국제 외교가 교차하는 전략의 무대다. 투레벨게임에서 승리하려면 협상 대표는 외교관이자 정치 전략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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